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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보, 그는 누구?

5분정보 2017. 7. 15. 17:25

류샤오보, 그는 누구?

중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의 사망소식이13일 전해졌는데요. 중국 인권의 상징인 류샤오보의 죽음에 전 세계가 애도를 표하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우리 나라에서도 젊은 층에서는  인권운동가인 류샤오보를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정리해봤습니다.



□  촉망받는 학자이자 작가인 류샤오보 천안문 사태로 인생이 바뀌다.

류샤오보는 1955년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89년 천안문사태(천안문 6.4항쟁)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젊고 유망받는 작가이자 학자였는데요. 그가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체류하는 도중인 1989년6월4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천안문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민을 유혈진압하는 끔직한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이전까지 학술에 전념했던 류샤오보는 단숨에 중국으로 넘어와 천안문에서 벌어지는 민주화 운동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인생은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류샤오보가 감옥에 간 이유

이때, 류샤오보는 시위대 대표로 중국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천안문 항쟁 주동자들은 해외로 망명을 떠난는데도 류샤오보는 중국에 남아 '천안문 사태진상 진상'을 요구하며 각종 집필 활동 등으로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활동을 꾸준하게 이어 왔습니다.

이에 이런 류샤오보에게 중국 당국은 노동개조형 3년을 선고했고, 노조개조형운 받은 이후에도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추진하였고, 2008년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08헌장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가 징역 11년과 정치권리 박탈 2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 노벨평화상 수상 & 노르웨이에 대한 경제적 보복

2010년 노벨평화상의 수상자는 류샤오보로 선정되었는데요. 2010년 12월 10일. 류샤오보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 ,친척들과 인권운동가 등 수백병을 출국 금지 시켰기 때문에 노벨평화상 수상은 공석으로 거행됐고 중국은 곧바로 노르웨이에 단교를 선언했었습니다. 

류샤오보의 노벨상사건으로 지금 우리에게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문제로 경제적인 보복을 하는 것처럼 중국은 노르웨이산 연어수입을 방해하는 무역 보복을 철저히 시행해왔다고 합니다. 중국에 있는 연어의 90%가 노르웨이산이 었기때문에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것이지요. 



 

□  2017년 7월 13일 투병 중 사망

2017년 6월에 온몸에 암세포가 전해져 더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사태에 이르자 병보석으로 풀려났는데요. 류사오보의 가족들은 독일로 출국하여 치료를 받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장거리 비행으로 오히려 건강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를 대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 당국이 류샤오보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행동이겠지요. 7월초까지 배에 복수가 심하게 차고 장폐색, 패혈증 등 투약 등의 치료조차 중단될 정도로 악화된 가운데 결국 2017 년 7월 13일, 향년 61세로 별세했습니다.


□ 류샤오보의 죽음에 대한 중국정부의 반응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의 죽음과 그의 죽음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을 내정간섭이라 규정하며 불편을 기색을 드러내는가 하면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의 방문도 막는 등 단속 또한 강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 조국을 사랑한 류샤오보 

그는 학자나 작가와 같은 꽤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해외로 나가 외국대학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살거나 중국 당국과 야합하여  행복하게 살수 있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는 갔고, 한 줌의 재로 남았지만 자신의 조국, 중국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스스로 선택한 운명앞에 당당했고 후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사경을 해매는 가운데서도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내 류샤에게 잘 살아 달라는 말이었는데요. 아무쪼록 중국 정부가  류샤가 잘 살 수 있도록 해외출국을 허락해주길 바랍니다.